클레스원 (2024-02-16 오후 3:38:49)
영화 '300'은 고대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와 그의 병사 300명이 대적한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과의 전투, 즉 기원전 480년에 벌어진 테르모필레 전투를 주제로 그린 작품입니다. 이 전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한 차례로, 숫자적으로 월등히 우위에 있던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스파르타 병사들이 용감하게 맞선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300'에서 그린 전투의 모습과 실제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영화에서는 스파르타 본국이 레오니다스에게 지원병을 보내지 않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로부터의 지원병도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영화에서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동원했던 것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는 수백만 명에 달했지만 이는 사실상 과장된 숫자로, 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페르시아 군대는 약 20만에서 3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 군대는 육로를 통해 그리스 본토로 진입하려 했으나, 천연의 요새 역할을 하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와 그리스 연합군의 저항을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병사들은 페르시아 군대를 잘 막아냈으나, 어떤 그리스인의 배신으로 인해 페르시아 군대는 협곡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 병사들은 모두 전사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용감한 저항은 후세에 큰 영감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단지 수백명의 그리스 병사가 수십만의 페르시아 군대를 상대로 저항한 것으로, 그 영웅적인 모습은 그리스의 독립 정신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이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과연 흥미롭고 많은 교훈을 담고 있는 이벤트입니다. 이 전투는 철학적이나 전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스파르타 병사들은 결국 모두 전사했으며, 페르시아 군대는 이후 아테네를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동안 양성해왔던 해군을 이용해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페르시아가 왜 굳이 육지를 돌아가며 좁은 골짜기에서 고전하게 된 것일까요? 당시에는 해상 수송 기술이나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해로를 통해 많은 병력을 수송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는 육로를 통해 그리스를 침공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테르모필레 전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 병사들은 어떻게 엄청난 병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고대 전쟁에서의 개인의 역할과 그들의 전투 방식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개인 병사의 능력 차이가 전투의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페르시아 병사들은 대부분 경장을 착용하였지만, 그리스 병사들은 갑옷, 방패, 투구 등을 착용하였고, 이는 결국 전투에서의 우위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한 사용된 전술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주력 병법은 팔랑크스라는 군법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병사들이 긴 창을 들고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며, 한 줄로 늘어서서 적을 상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적의 수가 많더라도 잘 조직된 작은 부대로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테르모필레 협곡은 팔랑크스의 약점인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는 좁은 지형으로 이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스파르타 병사들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병력을 일정 기간 동안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스파르타의 저항은 허사가 되고, 그리스는 아테네의 해군에 의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아테네의 위상을 높이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인 델로스 해연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전투의 패배는 전쟁의 승리로 이어지며, 그리스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살아가던 아테네는 그리스의 패권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들의 권력은 델로스 동맹을 통해 다른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즉 폴리스들에게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아테네는 이 동맹에서 받는 분담금을 도시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그 예로는 신전 건설과 함대 건조 등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아테네는 도시를 더욱 발전시키고,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이런 행동은 다른 폴리스들의 반발을 이끌어냈습니다. 아테네의 이런 제국주의적인 행동이 다른 폴리스들의 불만을 증폭시키면서, 일부 폴리스들은 아테네에 반대하는 스파르타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냉전 시대의 소련과 미국 사이의 갈등과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국제 정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후 기원전 433년, 케르키라와 코린토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로 인해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위협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고, 이는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페르시아는 그리스와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만으로는 그리스를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전략을 세우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의 내부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의 각 패권국에 적대적인 폴리스들에게 정치자금이나 군비를 지원하며, 그리스 내부에서의 갈등을 유발하였습니다. 이런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내전에 시달리며 페르시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의 실제 병력의 숫자는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수많은 왕국과 제국의 흥망성쇠가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거부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스파르타는 모든 시민들에게 금욕적인 삶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황금이 쏟아져 내리자 스파르타의 태도는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금욕을 너무나도 억누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은 결국 억누를 수 없는 것입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항복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이 전쟁의 승리자로서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패전국들에게 과도한 공문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하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이런 스파르타의 폭압적인 행동으로 인해 그리스의 다른 폴리스들의 불만은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을 향해 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해군을 증강시키며 아테네를 무릎꿇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스파르타에게 그리스의 맹주로서의 명분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스파르타의 왕 라이사나크스 2세는 기원전 396년에 페르시아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원정은 연전 연패를 거듭하게 되면서 스파르타는 포아시아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막대한 군자금에 이끌려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 등의 폴리스들이 스파르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은, 결국 페르시아의 심장부인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노리던 스파르타의 왕 라이사나크스 2세를 본토로 불러들이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 폴리스들의 행동은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의 복잡한 정치적 인과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라이사나크스 2세가 스파르타로 복귀하였을 때, 그는 페르시아의 3만명의 '궁수'로 인해 패배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궁수'라는 표현은 실제 병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황금을 상징한 것으로, 페르시아의 화폐에는 궁수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의 패배에 대한 미묘한 은유로, 페르시아의 황금에 이끌려 스파르타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을 잘 보여줍니다. 스파르타는 원칙적으로 극한의 경제적 격차가 없는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황금이 풍부하게 흘러나오면서 스파르타 사람들은 돈의 가치와 그로 인한 경제적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실물경제가 공개되었습니다. 러브오일이런 변화는 물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였고, 이에 대한 대처 경험이 전혀 없던 스파르타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으며, 스파르타 정부 역시 이를 해결할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스파르타의 힘은 그들의 개인의 뛰어난 전투력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전사들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 철저한 전투력을 갖추었으며, 이는 스파르타의 주요한 특성 중 하나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시민들은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경제 활동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었습니다. 이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직업은 병사였으며, 이는 그들의 사회 구조를 더욱 독특하게 만들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10세 때부터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군사적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강인한 전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여성들은 강인한 남자 아이를 낳는 역할을 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생활은 매우 검소했으며, 그들의 의복과 식사, 생활 습관은 아테네인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이 먹는 빵과 검은 스프를 '개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황금이 풍부해지면서 아테네이너들은 영리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인들도 사치에 빠져 군사 훈련에 충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의 맛을 본 스파르타인들은 창업에 뛰어들게 되어 상업적 수완이 부족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뒤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가 심화되었고, 그 결과로 중장 병사 대부분이 순수 시민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몰락한 스파르타인들은 식사비, 교육비, 무장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게 되어 시민 계급의 자격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약화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황금을 받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소수정예 병력이 없어 반란을 진압할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팔랑크스는 스파르타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전략적 천재였던 테베의 에파미논데스는 기원전 370년에 매우 큰 레우크트라 전투를 벌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은 숫자가 부족하더라도 그 위용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에파미논데스는 스파르타의 팔랑크스 약점을 파고들었고, 이로 인해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전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보여준 개개인의 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병력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